엘레나는 알고 있다: 클라우디아 피녜이로 장편소설
죽음을 맞아 밤새 안녕하며 행복하게 떠나는 행운을 기대하지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가톨릭을 믿는 친구 부인은 하나님을 믿으면 그럴 수 있다며 가능성을 높게 이야기하지만, 내가 믿는 예수님은 편한 죽음을 얘기하기보다는 죽어 천국에서 맞겠다는 말씀 위주로 하셔서 죽는 과정은 개인이 부담해야 할 일 같습니다.
죽음을 준비한다는 말은 스스로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사지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불행에 대한 경계를 표현한 말입니다. 연명치료를 거부하거나, 안락사를 원하거나, 자살을 택하거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타인의 도움에만 의존하는 불행을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막상 불행이 닥쳤을 때는 자기 결정권을 상실합니다. 아내나 자식의 결정을 눈 뻔히 뜨고 지켜봐야 합니다. 당황스럽고 황당하지만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죽음을 맞는 사람의 입장과 가족들이 지켜볼 죽음의 과정은 또 다릅니다. 자살을 한 망자를 수습하고 장례를 치르는 가족들의 마음은 아마 편하지 않을 겁니다. 과거 시골 동네처럼 이웃집의 이 빠진 그릇 수까지 아는 정도는 아니지만, 이웃들의 구설수에 이사를 갈지도 모릅니다. 이런 낭패를 주지 않으려면 죽음을 준비하는 입장에서 남은 가족의 마음도 충분히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본인의 결심은 가족과의 관련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온전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집에서 기르던 개의 기억입니다. 맞벌이를 하는 아이는 돌볼 시간이 없다며 아픈 개를 병원에 입원시켰습니다. 퇴근하면서 잠깐 병원에 들러 개를 지켜보고 왔습니다. 노견이었고 의식도 없이 유동식을 공급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병원에 입원시켜 돌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아이에게 나는 녀석을 집으로 데려오라고 했습니다. 퇴근 후의 시간을 온전히 같이 하며 유동식을 끊고, 아이가 할 수 있는 간병을 하라고 했습니다. 간간히 신음하는 소리도 듣고, 쓰다듬기도 하고, 물도 먹이면서 녀석을 보내는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녀석은 불과 열흘도 못 버티고 다행스럽게 아이가 집에 있는 시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습니다. 그 경험은 나에게 의미가 있었습니다.
나를 요양원에 보내지 말아라. 내가 말기에 이르면 열흘 정도는 집에서 돌보면 좋겠다. 스스로 삼키지 못할 정도면 유동식은 거부한다. 물만 주면 족하다. 그러면 열흘이면 될 것이다. 스님들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스스로 곡기를 끊는 방법이 예견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일 듯합니다. 아이들이 아비를 떠나보내는 아쉬움을 느끼지 않도록 열흘 정도 돌보게 하고, 돌보는 시간이 무한정 길어질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법으로 좋다고 믿습니다. 이런 나의 생각을 얘기하기도 했습니다.
엘레나는 리타의 도움을 받고 살아갑니다. 파킨슨 병으로 딸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일상을 유지하기가 점점 힘듭니다. 그런데 비 오는 날 리타가 성당의 종탑에 목을 매단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엘레나는 딸이 피살되었다고 주장하지만, 경찰은 리타가 자살한 것으로 결론을 냅니다. 엘레나는 파킨슨 약을 먹고, 간신히 발을 움직여 도움을 줄 사람들을 찾지만, 여의치 않습니다. 엘레나는 무엇을 알았을까요? 알고 있는 진실은 무엇일까요? 자살인가 타살인가를 찾아가는 추리소설 형식이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추리소설은 이렇게 엉성하지 않습니다. 형식이 그렇다는 말로 퉁치기에 억지스럽습니다. 정교한 심리소설입니다.
파킨슨병이 더욱 심해지는 과정에서 엘레나는 추가하여 파킨슨플러스 병이라는 진단을 다시 받습니다. 엘레나를 돌보던 리타가 절규합니다. 이때, 엘레나와 리타가 나눈 말입니다. “얘야, 난 살고 싶단다. 지금 엄마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에요. 무슨 방법이 있다고 해도 내가 더 감당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날 요양병원에 집어넣을 생각이로구나. 아니야, 엄마. 요양병원이라니, 절대 아니야. 알았다, 내가 어떻게 되든지 상관없다는 거구나. 정 싫으면 그렇게 하렴. 억지로 나를 돌볼 필요는 없으니까. 하지만 난 집에 혼자 있을 테니까 그리 알거라.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모녀의 대화가 깨어집니다.
진단을 했던 의사가 하는 말입니다. “부모님한테 받은 걸 되돌려드릴 때가 된 것 같구나. 오래전에 네가 어머니를 필요로 했던 것처럼 지금 어머니에게 가장 필요한 사람은 바로 너야, 리타. 이제는 네가 어머니의 어머니가 될 차례라고. 우리가 아는 엘레나는 이제부터 아기가 될 테니까.”
리타는 결국 오랫동안 참아온 울음을 터뜨리며 말합니다. “박사님. 우리 엄마는 절대 아기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난 당신이 부탁한 것처럼 엄마의 어머니가 될 수 없을 것 같다고요.”
아르헨티나라고 사는 사람이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윤회가 아르헨티나라고 일어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남의 인생에 개입하는 일이 업보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윤회와 업보는 지구 어디에서도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옮긴이는 ‘타자의 육체, 혹은 여성의 육체에 새겨진 그림자와 빛’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을 해설합니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여성’을 강조한 것은 초점을 벗어났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엘레나에게는 가족이라고는 리타뿐입니다. 만약 엘레나에게 남편 밖에 없었다면 남편의 고통은 리타와 달랐을까요? 그렇다면 제목은 ‘타자의 육체에 새겨진 그림자와 빛’이라는 제목이 타당할 듯합니다.
엘레나를 보면서 요양병원에 보내지 마라고 했던 내가 부끄러워졌습니다. 돌볼 가족에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모습 그 자체가 가족들의 마음에 그림자를 만들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면서 어떻게 빛을 찾아야 할지 고민이 더 깊어졌습니다. 하나님만 믿어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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