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대의 병적 징후들 : 위기에 빠진 21세기 세계의 해부
책의 시작은 다음의 인용문으로 시작합니다.
“낡은 것은 죽어가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위기는 생겨난다. 이 공백기에 다양한 병적 징후가 나타난다.” (안토니오 그람시)
안토니오 그람시는 이탈리아 무솔리니 치하의 파시즘에 대항하여 싸운 정치인입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설자로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입니다. 그가 무솔리니에 의해 투옥된 해는 1926년이었고, 1930년 이 글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는 1937년 옥중에서 뇌출혈로 사망합니다.
모든 말은 태어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야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생각이 시대적 상황과 동떨어져 엉뚱하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1930년대의 이탈리아와 유럽의 상황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세상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람시는 낡은 자본주의를 대신해서 공산주의가 생겨날 것을 기대했겠지만 알다시피 그렇게 흘러가지 않습니다.
저자는 그람시가 죽고 80년이 지난 오늘날 우리의 상황을 묘사하는 데에도 여전히 의미가 있을까 생각합니다. 파시즘이 사라지고, 자유민주주의는 어느 때보다도 더 많은 나라에 존재하는 시대에 낡은 것은 무엇이고,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새로운 것은 무엇일까 생각하게 하는 책입니다. 그의 주장은 수많은 사례들(세계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 정치상황, 정책들)을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열하며 우리를 설득합니다. 그러다 갑자기 희망을 얘기합니다. 마지막 장에서 희망을 대하기에는 그의 주장을 따라가다 낡아버린 세상에 절망을 한 때문인지 뜨악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무언가 붙잡을 게 있어야 새로운 것을 만들거나, 맞이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겠지요.
국내 정치 뉴스도 넘치는 판국에 다른 나라의 정치 소식은 아무래도 수박 겉핥기일 수 있습니다. 글로벌화된 지구촌에서는 다른 나라의 움직임이 우리의 삶과 무관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이 세계의 동향을 파악하는 방법 중 하나가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저자의 주장을 짧게 정리해 보겠습니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사이에 놓인 공백기의 주요한 특징은 불확실성입니다. (18쪽) 그람시가 이 말을 쓸 때 그가 바라지 않았던 세상이 이미 나타난 상태였다고 지적할 수도 있습니다. 새로 나타난 세상이 그람시가 바라던 세상이 아니라고 위기라고 할 수 없다는 반박이겠지요. 하지만 저자는 주로 서구에 초점을 맞추지만 다른 모든 곳의 사회와 정치에도 ‘병적 징후들’이 존재한다고 주장합니다. 인도, 터키, 투르크메니스탄, 브라질, 남아공, 필리핀, 미얀마, 서구인들의 무슬림 살해 등의 사례를 들어 병적 징후들을 설명합니다.
저자가 ‘병적 징후들’로 설명하는 대표적인 것은 각 장의 제목이 되었습니다. 외국인 혐오의 부상, 복지의 쇠퇴, 기성 정당의 몰락, 미국의 패권(투자라는 빌미로 전쟁 배상금을 요구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가 됩니다.) 유럽의 서사(‘유럽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통일된 일련의 원리와 가치라는 개념, 유럽의 통일 등은 지식인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지금까지 유럽연합은 2008년 전 지구적 경기침체, 중동 위기, 아랍의 봄 그리고 좀 더 최근으로 코로나바이러스 전염병 등 ‘유럽 연대’의 시험에서 모조리 실패했다고 주장합니다.) 그의 주장 각국의 정치인들의 말과 행동, 그들의 정책을 소개하며 줄줄이 증명합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제8장 잃어버린 희망?)에서 “오늘날의 병적 징후들은 앞선 수십 년간 이루어진 성장과 번영에 연결되어 있다. 대체로 현재의 불만은 환멸, 희망의 상실과 밀접히 관련되며” 어떤 슬로건으로도 “희망을 되살리지는 못한다.” 주장합니다. (323쪽)
그럼에도 “어쨌든 지난 여러 세기 동안 우리의 삶이 좋아졌다면, 그것은 바로 희망을 잃지 않은 사람들,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아무리 시대가 병들었어도 계속 끈질기게 싸움을 이어간 사람들 덕분이다.”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세상은 결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 한, 어느 순간 희망은 모양을 갖춥니다. 우리는 만들어진 모양에 환호하며 승리의 경험을 간직합니다. 그리고 다시 희망을 가지고 나아갑니다. 저자는 우리에게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고 그 많은 ‘병적 징후들’의 사례들을 징그럽게 나열하고 있습니다. 병든 현실에 질려 드러누울 판에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 현실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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