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
장강명은 월급사실주의 소설가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먹고사는 문제'에 대한 문제 의식을 지닌 작가들의 모임을 일컬어 월급사실주의 동인이라고 했다. '비정규직, 자영업, 프리랜서, 플랫폼 노동은 물론 가사, 구직, 학습 등도 모두 우리 시대의 노동으로 보고, 지금 한국 사회의 노동 현장을 치열하게 쓰고 있는 작가'들의 그룹이다. '사건의 배경을 최근 5년 이내의 시간대로 정한다'는 시간적 배경의 규정, '직접 발품을 팔아 조사하고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사실적으로 서술한다'는 기술 방법의 원칙 등 그들은 창작 규칙을 공유하고 작품을 집필한다.
그리고, 장강명은 신문 기자 출신 작가이다. 그는 십여년 동아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었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기자 작가의 소설이다.
2차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학살 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 600만명 학살의 핵심 실행자였고, 전후 아르헨티나에 숨어지내다가 모사드에 의해 체포되어 예루살렘으로 이송되었다. 그는 1961년 유죄 판결 이후, 사형 선고되었다.
1961년 예루살렘으로 날아간 독일 출신의 유대인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더 뉴요커'의 요청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해서 기고했다. 그 유명한 '악의 평범성'은 재판을 참관하며 기록한 그녀의 기고문에서 만들어진 개념이었다. '명령을 따랐을 뿐',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은 흉포한 괴물도, 끔찍한 사탄도 아니었다. 그저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별 생각없는 관료였다. 생각없음 thoughtlessness 이 만들어낸 인류 최악의 결과물이었다.
이 소설은 아이히만 재판과 한나 아렌트의 기고 8년 후 프리랜서 기자인 앤 모리시 메릭이 '아이히만과 체험 기계'라는 내용으로 기고한 내용이다.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앵커리지의 아이히만'으로 제목을 바꿔 달았고, 1961년 사형된 아이히만은 죽지 않고 1968년에 체험 기계 작동 실험을 직접 받게 된다는 설정이다. 유대인 출신으로 엄격하게 선발된 에밀 벤야민씨는 체험 기계에 아돌프 아이히만과 직접 들어가게 되고, 거기서 서로의 뇌 속으로 들어가서 유대인 학살에 대한 상처와 아픔, 분노와 상실감, 그리고 학살범의 악마성에 대해서 서로 교차 체험, 경험, 공감을 해 본다.
로절린드 프랭클린 박사의 기억 세포라 불리는 디그램 세포의 발견과 작동 원리, 체험과 공감의 정의, 체험 기계의 발명에 관여한 아인쉬타인 박사와 오펜하이머 박사 등등... 결국 독자는 에밀 벤야민을 검색하게 되고, 체험 기계가 정말 있는지 고민해 보게 될 것이다. 기자 출신 작가의 흡입력이 최대치로 가동된 스토리의 마성은 이 정도나 된다. 픽션임을 깜빡 잊고 기자의 기고문으로 순식간에 속지 않을 수 없다.
'나무가 됩시다'도 기자의 SF 소설이다.
그린 라이프 수술 (자가배양 강화엽록체세포 진피층 침습이식술)을 받은 자의 기록이다. 한국에서는 이 수술을 받을 수 없어서 캐나다에서 수술을 받고 왔는데, 성인 유전자 조작 전문의가 있는 정식 의료 시설은 캐나다와 이스라엘 뿐이기 때문이다. 이 기록의 목적은 그린 라이프 수술에 대한 타인의 반복되는 비슷비슷한 질문에 대한 일괄적인 대답을 글로써 남겨 두는 것이고, 그린 라이프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우고 세간의 편견을 줄이기 위한 의도도 있다.
수술의 고통은 강도 5 정도, 대략 포경 수술 수준이란다. 마취 후 진피 조직을 잘라낸다. 진피 조직에 강화된 엽록체 유전자를 삽입한다. 레이저로 피부에 작은 구멍을 내고 그 안으로 세포 조직을 밀어넣는 침습이식. 배, 등, 팔다리에 총 1만 4600개의 강화 엽록체 세포를 이식하면 끝난다.
이제 여름에는 하루 한 시간, 겨울에는 하루 두 시간 정도의 일광욕만으로 강화 엽록체는 당 외에 지방과 단백질을 충분히 합성한다. 탄소는 호흡으로 수소는 물로, 질소, 황, 인 그 외 무기염류와 합성 비타민 정도는 직접 복용한다. 일종의 비료라 부를 수 있겠다.
왕복 비행기표, 수술비, 호텔 숙박료 모두 포함 사천삼백만원 소요되었다고 한다. 그는 채식주의자에서 한 발 더 나가서 배양육이나 단백질 작물, 단백질 과일도 인류 먹거리의 대안이 될 수 없다는 가치관으로 설득한다. 그가 광합성을 직접 하기로 결심한 이유를...
그린 라이프 수술도 검색을 해봤다. 진짜 가능한 융합 생명과학의 미래인지...
'아스타틴'은 정통 SF 소설이다.
아스타틴은 목성권과 토성권을 지도하는 총통을 뜻한다. 새로운 아스타틴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로얄 패밀리의 왕좌 쟁탈전이다. 전 우주를 배경으로 최고 권력에 대한 갈망과 쟁취의 전략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스펙타클하게 펼쳐진다. 무협지와 스타워즈의 내공과 포스가 느껴진다. 익숙하지만 식상하지 않는 전개가 돋보인다.
이 단편 소설집 '당신이 보고 싶어하는 세상'은 STS SF를 표방한다. Science, Technology, Society 에 대한 SF. 아무래도 기자 출신 작가라는 아이덴티티에 더 잘 어울리는 대목들이 있다. 월급사실주의가 큰 원칙이라면, 이 단편집에서는 픽션을 팩트로 둔갑시키는 재주, 혹은 마법을 여러 번 본다. 혹시나 허구가 아닐까봐 몇 번이나 검색창을 두드렸다. 소설 읽다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했는데, 소설의 성취에 대한 대단한 찬사 아닐까 생각든다. 전작인 댓글 부대, 호모 도미넌스에서 당했는데, 또 속았다는 당혹감, 혹은 소설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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